우리들의 마음의 전설, '소설가 박경리의 문학세계'

'토지'로 기억되는 대한민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사회와 현실을 비판하고 인간성과 생명을 추구하는 작품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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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현대문학의 레전드, 토지의 작가, 박경리

   60세가 넘어 은퇴기에 들어선 시니어에게는 토지의 작가 소설가 박경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경리의 본명은 박금이 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1926년 10월 18일에 때어나  2008년 5월5일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박경리의 대표작은 대하소설 토지를 위시해서, 표류도, 성녀와 마녀, 은하, 내마음은 호, 녹지대 등 다양하다.  실버피아온라인은 박경리 작가 서거 14돌을 맞이하여 그녀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찾아보았다. [편집자 주]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대화정(현 통영시 문화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박금이'로, 박경리라는 필명은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1945년 진주공립고등여학교를,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현 세종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불행한 유년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리고 새장가를 들었으며 홀 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그리고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상에 대한 분노는 그녀를 극단적인 고독의 감정 속으로 밀어 넣었고, 그렇다 보니 이후 강하게 빠져들었던 것이 바로 독서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책 읽기를 좋아하여 책상 밑에 소설책을 숨겨 놓고 읽었다. 소박 맞은 모친이 바느질 등을 하여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궁색한 법이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수업료 때문에 몇 번씩 집에 쫓겨가야 했던 일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부끄러움이겠습니다만, 우연히 장롱 속에서 수업료의 천 배가 넘는 백 원 짜리 지폐들을 접어서 넣은 전대를 발견했을 때의 슬픔, 돈을 보았노라 했을 때 나를 보던 어머니의 험악한 눈은 타인의 눈이었습니다.”(수필 ‘십이년 만에’) 학창 시절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고 한다. 

 

고등여학교 시절을 통해선 “마치 동굴 천장에 매달린 박쥐처럼” 외롭게 지냈다고 한다. 다른 학과목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박경리가 유일하게 좋아한 과목은 역사였다. 독서에 대해선 ‘야욕’을 부렸을 정도였고, 학교생활을 지탱해준 유일한 벗은 시 쓰는 일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때론 이불 속에서 들킬까 노트를 감춰가며 매일매일 일기 같은 시를 썼다. “묶여 있다는 의식이 종이에 소리 없이 폭발했다고 나 할까”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1946년 거제 출신의 김행도[5]와 중매 결혼하고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현 세종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에 근무하였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편 김행도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까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박경리는 이러한 일들을 당하면서 겪어야 했던 엄청난 슬픔을 견디기 위해 글을 쓴 것이 글을 쓰기 시작한 한 동기가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정식 작가가 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경리가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시 문단의 중견 작가였던 김동리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고등여학교 선배였던 김동리의 부인네 집에 친구가 세 들어 살고 있었고,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친구가 말해버리면서 본의 아니게 박경리의 글이 김동리에게 읽히게 된 것이다. 당시 박경리는 소설보다는 시를 주로 쓰고 있었는데, 박경리의 시를 처음 본 김동리는 '상(想)은 좋지만 아직 (완성은) 안되었다'고 평했다고 한다. 당시 박경리는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는 사람을 불러다가 이런 망신을 당하게 하느냐"며 친구를 원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동리는 박경리에게 계속 작품을 가져와 보라고 말했고, 이후에는 시도 좋지만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시는 여성 작가가 드물었던 시기였는데,습작을 들고 문예 살롱을 찾아오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박경리 본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했고, 자신을 그린 스케치가 살롱 안을 돌아다니는 일이 일어나고 부터는 큰 모욕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을 안 하겠으니 자신이 제출한 원고를 모두 돌려 달라고 까지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던 중 김동리의 아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이 '현대 문학' 지에 추천되었으니 빨리 와서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뜬금없는 연락을 받는다. 박경리가 제출했던 습작들 중 '불안지대'라는 제목의 소설의 원고를 김동리가 가지고 있다가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바꿔 문예지에 추천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박경리는 연락을 받기 이전에 이미 '계산'이 수록된 '현대 문학' 지를 우연히 자기 작품이 수록된 줄도 모르고 훑어보았는데, 작가 이름도 작품 제목도 바뀌어 있으니 자기 작품인지 못 알아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추천을 두 번 받아야 정식 등단 절차를 밟은 것으로 보았는데, 박경리는 첫 추천을 받고 부터 비교적 늦은 편인 1년 후인 1956년 단편 '흑흑백백'으로 다시 추천을 받으면서 정식으로 등단하게 된다. 박경리는 이후 자신을 등단시켜 준 김동리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번 밝히기도 했다.

등단 직후에는 '불신시대'를 비롯한 단편 소설을 많이 썼으며, 50년대 말부터 6,7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는 장편 소설을 많이 썼다. 초기작 중에는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사는 전쟁 미망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안겨준 ‘불신시대’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몸부림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고 세상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 사로잡히다, 마침내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 할 수 있는 생명이”라고 독백 함으로써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생명력, 현실에 대한 각성과 세상의 부조리, 모순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의식 전환을 보여줬다. 장차 진화해나갈 박경리 문학의 밑그림이 펼쳐진 것이다. 박경리는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해왔던 당대의 한국 작가들과는 다르게 예외적으로 장편을 많이 쓴 작가로서, 그가 쓴 장편은 토지를 제외하고도 20여 편에 이르고, 특히 김약국의 딸들시장과 전장파시 등은 명작이라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표류도노을진 들녘가을에 온 여인 등을 썼는데, 나머지 장편 소설들의 경우는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박경리는 1958년 <불신시대>로 현대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수상한 다음 다음날 또다시 화재라는 액운을 만나 사과 궤짝의 살림 살이나마 다 날려버렸다. 그때 마침 딸아이는 중학교 입시의 시기였으므로 울었던 일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박경리는 글을 쓰고 또 써서 “영화 원작료다, 인세다, 원고료다 하며” 돈을 벌었다. 박경리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구러 하는 동안 나는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어디다 쓴 일도 있지만 소설가란 내게 천직이었던 모양으로 나는 어떤 직장이든 붙어있질 못했다.” 주위 사람들은 박경리를 걱정했다. “김말봉 선생님께서도 신문사를 그만둔 일을 꾸중 하셨고 내 자신도 어쩔 참인지 다만 막막하기만 했다.” 박경리는 이른바 ‘인기’나 ‘출세’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세속적인 성공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문학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는 의심과 자문자답은 나를 허황하게 흩뜨려 놓고 보다 깊은 고독과 사람을 만나기 꺼려하는 경향을 짙게 했을 뿐이다”라고 털어놓았다.

1962년 박경리는 전작 장편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했다. 당시 장편 소설은 문예지나 신문에 연재 된 다음 독자의 반응이 좋으면 책으로 묶어내는 게 하나의 경향이었는데 ‘김약국의 딸들’은 이례적으로 바로 책으로 출판됐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곧바로 독자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박경리는 당시로선 드물게 전업 작가의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1960년대의 작품이 1990년대에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아 1993년에 1쇄를 발행한 ‘김약국의 딸들’은 1995년까지 2년 동안 무려 42쇄를 거듭했다. ‘김약국의 딸들’ 전체를 지배하는 주술적 모티프는 “비상 묵은 자손은 지리지(번식하지) 않는다”이다. 김약국과 그의 딸들은 이 언어적 모티프처럼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 것으로 일관한다. 리얼리즘 적 관점에서 보면 우연이 연속해서 중첩되는 현상은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신비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개연성을 지탱한다.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운명적 배경과 그 원인을 밝혀내기 어려운 신비한 장치들이 작품의 곳곳에 포진해 있다. 언어의 주술성과 폐가를 중심으로 한 장치적 모티프, 그리고 곳곳에 나타나 작품의 주제를 암시하는 삽입 가요, 뚜렷한 설화적 구성 원리 등이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토속적인 것과 도시적인 것으로 나뉘고, 이 두 계열은 ‘토지’에서 융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약국의 딸들’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1964년에 발표한 ‘시장과 전장’은 후자에 해당한다. ‘시장과 전장’은 박경리의 1960년대 대표작으로, 사적 담론의 수준을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돌파한 작품이다. 작품의 한 축을 구성하는 여주인공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감상적이고 결벽증을 가진 인물에서 억척스러운 아내이자 어머니로 변신한다. 작품 속의 ‘전장’은 더 이상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체험의 공간이 아니라 삶에 개입하고 작용하는 사회적 환경이 된다. 또한 여주인공에게 전쟁은 이념으로 포장된 헛된 구호에 불과할 뿐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도 아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사람들이 그 어느 편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그 전쟁이 어느 한편에 가담할 수 있는 어떤 명분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라리 ‘생존을 위한 신중함’으로, 또는 ‘현실을 좇는 현명함’으로 전쟁을 관망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종국적으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 주범이 바로 전쟁임을 실감 나는 묘사를 통해 고발했다. ‘시장과 전장’은 6·25전쟁을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문제 삼은 작품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소설이다. 그때까지 무수하게 나온 그 어느 작품보다 6·25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다. 그리고 전쟁이 지니고 남긴 상처, 가령 사회악, 인간성의 타락 내지 상실, 개인적인 비극과 빈곤, 인간적인 본능 등의 문제들을 커다란 캔버스에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1969년 그녀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1994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써냈다. 사 반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세상일과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