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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의 눈으로 보는 세상'

윤미향 사태와 신양반 사회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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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을 옹호하는 논리가 조선후기 양반사회를 떠받치던 성리학적 인식체계와 너무나 닮아 있다

운동가들의 ‘정의’는 법 위에 존재, 유교의 ‘의’에 가깝다. 공정한 법 집행인 시민사회 정의와 달라

‘정치·도덕 분리되지 않은 양반사회 Vs 모두가 도덕적으로 평등한 시민사회’ 선택 묻는 윤미향 사태'

 


누가 도덕적으로 우월한가? – 신양반사회의 도래


“회계상의 문제는 투명하게 할 필요가 있는데…위안부 문제를 가지고 싸워왔던 한 시민운동가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한다.”

“친일, 반인권세력, 반평화세력이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려는 운동을 폄하하려는 부당한 공세…”

“전 세계에 세워진 소녀상은 정의를 기억하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운동, 평화운동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다소 잘못이 있다고 해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온 세계적인 인권평화 운동가를 내친다면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손실이 될 것이다.”

 

최근 윤미향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가장 주목하게 되는 것은 윤미향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그들의 논리는 조선후기 양반사회를 떠받치던 성리학적 인식체계와 너무나 닮아 있다. 단지 양반, 군자, 소인 등의 용어를 쓰지 않을 뿐이다.

윤미향 사태는 한국 사회가 정치와 도덕이 분리되지 않은 양반 사회로 회귀하느냐, 모든 시민이 도덕적으로 평등한 시민사회로 전진하느냐의  선택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양반문화에서 군자와 소인, 존귀한 자와 천한 자를 구분했듯이 그들은 사회구성원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분류한다. 한 쪽에는 사회정의를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며 사는 사회운동가들이 있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사람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사회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다른 한 쪽에는 자신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 권력에 아부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운동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운동가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이며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윤미향과 그의 지지자들이 말하는 ‘정의’는 시민사회의 정의와 다르다. 근대 시민사회에서 정의는 바로 법을 지키고 법을 집행하는 것을 뜻한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자가 법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예컨대 살인자가 법에 따라 합당하게 처벌받을 때 미국인들은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한다.

 

“Justice is done.”

 

따라서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법치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바로 정의로운 사회이다.

반면에 운동가들이 추구하는 ‘정의’는 법 위에 존재하는 윤리규범인 유교의 ‘의’에 가깝다. 유교에서 ‘의’는 인간의 내면적 본성에 근거한 인격적 행위규범이며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욕망과 충돌하는 사리사욕과 대립된다.

 

유교적 인간관은 사람을 ‘의’를 추구하는 ‘군자’와 사적인 이익을 좇는 ‘소인’으로 구분한다. 조선후기 ‘양반’은 바로 ‘군자’와 그의 자손들을 일컬었다. 조선이 지향했던 덕치는 의를 추구하는 군자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소인을 교화를 통하여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유교 이념은 인간 내면의 도덕성에 근거한 ‘의로움’이 법제를 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덕과 예로써 다스리는 덕치를 법령과 형벌로 다스리는 법치보다 중시하였다.

윤미향과 그의 지지자들이 조국 지지자들처럼 법을 어긴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민사회에서 회계부정은 사회적 신뢰를 파괴하는 심각한 범법행위이다. 그런데도 불투명한 회계를 사소한 문제라고 여기고 당당하게 윤미향이 지난 30년 동안 사회정의를 위한 시민운동을 이끌어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정의는 법 위에 존재하는 도덕적 심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그들은 위안부 피해보상과 관련하여 일본측이 제시한 법적인 해결을 ‘진정한 사죄’가 아니라는 애매모호한 이유로 거부해왔다. 이는 그들의 ‘정의’가 애초부터 법으로 해결될 수 없는 도덕적 이슈였기 때문이다.

운동가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 역시 유교적이다. 유교에서 역사는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고 분석하기보다는 인물과 행위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도덕적 평가에 중점을 둔다. 역사를 서술하는 목적이 윤리의 실현에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사서의 기록을 통해 그 악행을 후세에 남기는 것은 붓으로 악인을 죽이는 일이요 역사의 심판”

 

이라고 하였다. 정의기억연대는 다양한 기억이 혼재하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정의연의 도덕적 기준에 맞는 기억만을 ‘역사의 진실’이라고 밝히고 국내는 물론 세계에 일본의 ‘악행’을 알리고자 하였다.

 

당연히 그들의 역사에 위안부 피해자들은 주체적인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미 정해진 선악의 틀에 맞추어 위안부들의 삶은 해석되고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운’ 그들에게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저 수동적인 교화의 대상(objects)으로서만 존재한다.

 

피해자 당사자인 이용수(존칭생략)는 이에 대해 항변한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시민운동가가 존재하게 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취급당한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일본을 악으로 규정짓는 데 동원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이다.

 

생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살아온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의를 위해 살아온 사람들을 조그만 잘못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해선 안된다. 그리고 마치 조선시대 군자의 자손들이 양반으로서 대접을 받았듯이 자자손손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원금으로 운동가의 자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자기 희생을 하며 의로운 일을 해왔는데 자식을 도와주는 것은 그 희생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운동가들이 그렇게도 실현시키고자 하는 정의로운 사회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도자들에 의한 통치, 즉 덕치를 지향하는 양반사회이지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아니다. 그들이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는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이다.

 

그러나 근대적 시민사회는 도덕적으로 평등한 사회이다. 그 어느 집단도 다른 집단에 비하여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상정하지 않는다. 국가의 리더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누구나 똑같이 한 표의 투표권을 행사한다.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하기 때문이다.

 

운동가가 아닌 사람들은 권력에 아부하기 위해 사회운동에 나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기 때문에 다른 길을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덕치가 이루어지는 유교사회는 사상의 자유와 이로 인한 다양한 사상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다. 반일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일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두 집단 중 어느 집단이 도덕적으로 우월한지 측정할 방법은 없다. 단지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윤미향 사태는 종국적으로는 한국 사회가 정치와 도덕이 분리되지 않은 양반 사회로 회귀하느냐 아니면 모든 시민이 도덕적으로 평등한 시민사회로 전진하느냐 하는 선택의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출처: 제3의 길 (김은희)-20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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